여성중앙 2004년 3월호
그는 마치 하나의 무인도 같았다. 인간의 방문은 차단하면서 봄볕에 날아든 나비 한 마리에게는 온 섬을 내줄 줄 아는, 그런 섬 말이다.
그는 스물여덟 해를 망망대해의 사계절과 싸우며 자기 자신과 가족이라는 섬을 지켜냈다.
이젠, 지금까지 그 섬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해 웃으며 이야기할 때다.
처음은 좀 가볍게 시작해볼 생각이다. 나는 스물여덟의 청년이다. 연기하느라 결석이 잦았던 터라 과연 올해 졸업을 할 수 있을까 걱정하는 중이고,
드라마에 같이 출연했던 여자 연기자와의 스캔들로 머리가 아프기도 하다. 어떤 옷에든 제일 잘 어울리는 모자를 척척 매치할 줄 아는 패션 감각도 있고, 수영으로 다져진 몸매는 어디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다.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귀공자 같다는 말을 자주 듣고, 그 말 듣는 걸 좋아한다. 작년엔 SBS 연기대상에서 특별기획 부문 남자연기상과 10대 스타상을 받았고, 학창시절 전국체전에서 평영으로 동메달을 딴 적도 있다. 여전히 상 받기 전엔 설레고, 상 받고 나선 쑥스럽다. 영화 ‘공공의 적’에 나오는 악역같이 극악무도한 역할을 맡아 연기해보고 싶은 욕심도 있으며, 서른다섯 살 즈음엔 호텔 경영학을 전공하러 유학을 떠날 계획을 갖고 있다.
작은 섬, 등대 하나
누군가 “죽고 싶은 적이 있었냐”고 물었다. “없다면 거짓말이죠”, 짧고 냉정하게 답하는 것으로 더 이상의 질문을 피했지만 그 순간 내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만큼은 들켰을 것이다. 나에게 있어 ‘죽음’이란 것은 늘 ‘어머니’란 단어와 함께 떠올랐다가 ‘어머니’란 단어와 함께 사그라 들곤 했다
어머니는 8년 전,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30만원짜리 둥지를 지키기 위해 매일 아침 집을 나섰다. 그 때 나는 수영 선수였고, 대학생이었으며, 어머니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었다. 나는 승헌이 형과 함께 청바지 브랜드 스톰의 모델로 활동하게 되면서부터 어머니의 짐을 나눠 지기 시작했다. 둘이 나누면 반으로 줄 것처럼 보이던 빚은 좀처럼 줄지 않았고, 일수 돈을 쓰며 보내야 했던 힘든 날들도 있었다. 힘겨워하는 ‘어머니’를 생각하며 죽을 마음을 먹다가도, 나 때문에 사시는 ‘어머니’를 생각하면 삶이 보였다.
어머니는 내게 있어 등대였다. 섬 전체를 밝혀주질 못하지만,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 어둠에게 길을 비켜 가라고 신호를 보내는 그런 존재였다. 그런데 나는 늘 고마움을 표현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멀뚱히 서 있기만 할 뿐이다. 우리 모자는 가끔 함께 술을 마신다. 어느 날 술잔을 기울이다가 묵묵히 나를 바라보기만 하시던 어머니가 “지섭아, 엄마는 가끔 네가 궁금하다”고 말씀하셨을 때, 비로소 ‘나는 어머니에게도 낯선 섬이었구나’ 생각했다. 그냥, 섬에는 원래부터 등대가 있었고, 그 등대는 밤마다 불을 켜는 게 임무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 존재감은 항상 큰 힘이 됐지만, 한동안 섬이 등대의 존재 이유라는 것을 까맣게 잊고 살았던 거다. 옛날에 비하면 지금은 천국이다. 내가 좋아하는 연기를 하고, 연기의 대가로 돈을 받고, 거기에 팬들의 사랑까지 받으며 살고 있으니까. 그런데도 나는 아직 등대에게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이제는 어머니가 등대지기가 되어 나라는 섬을 거니셨으면 좋겠다. 나는 등대지기에게 쉼을 주며 살고 싶다.
지도에는 없는 섬, 소지섭島
나는 꿈 많은 섬(島)이다. 가끔 표류하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주로 혼자다. 그래서 꿈을 꿀 수 있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은 나는 몇 달이고 세상 밖으로 나가지 않을 때도 있다. 자다가 일어나서 밥 먹고, 비디오 몇 편을 보다가 다시 좀 뒹군다. 그러다 장르 구분 없이 좋아하는 음악을 실컷 듣고, 웹서핑 몇 분 하다 보면 하루가 간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모여 한 달이 되고 문득 달력을 봤을 때, 몇 개월이 지나 있기도 한다. 친한 사람들과는 죽고 못 사는 사이면서 낯선 사람과 친해지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지금의 성격은 그래도 많이 바뀐 편이다.
8년 전, 청바지 브랜드 스톰의 광고를 찍을 때 처음 승헌이 형을 만났다. 지금은 둘도 없는 사이지만, 우리의 만남은 참으로 사무적이었다. 최종 합격자 오디션에서 승헌이 형이 말을 걸어왔다. “몇 년 생이세요?” 나의 대답은 짧았다. “77”. 그때 형은 얼마나 뻘쭘했을까? 그 후 촬영을 마치고 가진 술자리에서 승헌이 형이 참 좋은 사람이라는 걸 느끼고 어떻게 말을 붙여볼까 내내 고심했다. 형이 화장실에 가는 걸 보고 따라갔다.
가서는 내뱉은 한 마디, “형, 이제 우리 뜨는 거야?” 인천에 살면서 차가 없었던 시절, 차비 아끼려는 나에게 자기 없는 방까지 기꺼이 내주었던 형은 어쩌면 소지섭이란 섬을 세상 밖에 알릴 수 있도록 도와준 가장 큰 힘일지 모른다.
무인도, 잠깐 쉬었다 가는 곳
다른 사람으로 살 수 있다는 건 분명 매력 있는 일이다. ‘남자셋 여자셋’‘왕룽99’‘모델’‘로펌’‘유리구두’‘지금은 연애중’‘맛있는 청혼’‘천년지애’…, 지금의 ‘발리에서 생긴 일’까지 그동안 내가 출연했던 드라마를 쭈-욱 읊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놀란다. 그 다음, “그러고 보니 거기 나왔었구나”가 순서다. 대부분이 인기 드라마였고, 모두 꽤 비중 있는 역할들이었는데…. 내가 주목받기 시작한 건 SBS ‘뷰티풀 라이프’의 ‘대한해협횡단’을 찍을 때인 것 같다.
어려서 몸이 약해 배우기 시작한 수영이 내 인생에 빛을 가져다줄 줄은 몰랐다. 수영을 그만둔 이유가 ‘비전’이 없어서인데, 마지막으로 딱 한 번 내 인생을 도왔다. 학창시절 전국체전에서 입상할 만큼 주목받는 수영 선수였던 나는, 결국 수영 코치가 되는 게 내 인생의 마지막 직업이 될 거라는 뻔한 결과가 싫어 11년 동안 한길처럼 여겼던 수영을 버렸다. 그리고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다.
매번 새 드라마를 만들 때마다 나라는 무인도엔 새로운 표류자가 배를 댄다. 그리고 외로움과 싸우며 섬을 가꾸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드라마가 끝날 즈음 구조의 손길을 만나 바깥 세상으로 돌아가곤 한다. 얼마 전, 발리로부터 온 ‘인욱’이란 표류자가 내 안에 발을 들여놓았다. 등대만 하나 있는 섬과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무뚝뚝한 아들은 어딘지 모르게 닮은 구석이 많다.
가난은 꿈을 이기지 못한다. 내가 좋아하는 숫자는 51이다. 100에서 절반을 넘었다는 건 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이니까. 지금 한창 ‘인욱’은 나라는 섬에서 희망을 찾고 있는 중이다. 51%의 가능성을 가지고 말이다.
취재_정미경 기자 사진_이동욱(EEDONG STU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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